[CEO 초대석] 한목경 ㈜두리식품 대표
인생 두 단어 魂과 樂, “혼신의 힘 다하면 즐거움 오죠”

9남매 중 여덟 째, 가난을 디딤돌 삼아 300억 매출 회사 키워
“최고의 경영 노하우는 권한위임, 믿고 맡기니 일 더 잘 풀려”
빠른 판단력·무난한 성격, “관리하려고 하지 말고 관심 가져야”
“청결이 핵심, 내 가족이 먹는다 생각하며 좋은 고기 만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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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근 기자
기사입력 2021-01-15 [20:29]

▲ 도축된 돼지 앞에서 포즈를 취한 한목경 대표.  © 화성신문


  

()과 락(). 돼지고기 육가공 회사인 두리식품 한목경 대표의 가슴과 머리를 채우고 있는 두 단어다. 혼을 담아 기업을 경영하고, 그 결과 대표인 자신을 비롯 모든 직원들이 즐거운 인생을 살기를 바라는 소망이 담겨 있다.

 

사람이 먹을 음식을 다루는 업()이기에 청결 유지에 목숨을 건다. 현재 하루 작업 물량은 250~300마리. 도축된 돼지를 공급받기 위해 지불해야 할 금액은 하루 평균 1억 원에 달한다. 매일 1억 원을 지체 없이 결재한다. 지난해 매출 규모는 300억 원대다.

 

1964년생인 한 대표는 전라남도 나주에서 72녀 중 여덟 번째로 태어났다. 6살 때 전 가족이 과천으로 이사 왔다. 부모님은 남의 땅에서 농사를 지었다. 찢어지게 가난해서 밥을 먹을 수 있는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국민학교를 졸업했지만 중학교 들어갈 형편이 안됐어요. 소 네 마리를 키웠어요. 1년 지나니까 넷째 형이 중학교는 졸업해야한다고 하면서 보내주더군요. 그래서 중학교를 나왔어요. 고등학교도 못 갈 형편이었는데 등록금이 싼 안양공고 섬유과로 가게 됐죠. 2학년 때부터 대학교 공부를 했었어요. 3학년 1학기 까지 하다가 도저히 대학교에 갈 형편이 안돼서 포기했어요

 

3학년 여름방학 때 산업전선에 뛰어들었다. 학교에 봉급이 제일 많은 곳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안양에 있던 큰 섬유회사에 취업했다. 월급은 14만 원이었다. 2교대 근무였다. 낮에는 11시간, 밤에는 13시간 근무했다. 일주일씩 번갈아가며. 영장 받고 이틀 정도 쉬다가 입대해 18개월 군 생활을 마쳤다. 제대 후 3일 만에 다시 그 회사에 재입했다. 열심히 일했다. 반장이 되고 부서장이 됐다.

 

 

▲ 생산직 직원들이 작업하고 있는 현장 전경.  © 화성신문


  

구제역 터졌을 때, 중고차 시장 가서 5톤 탑차 샀죠

 

“88올림픽이 끝나면서 섬유산업은 하향산업이 됐어요. 섬유업체들이 해외로 진출할 때, 제가 다니던 회사도 인도네시아에 2공장을 지었어요. 1989년도에 부서장으로 갔죠. 가장 젊은 나이였어요. 1995년도까지 인도네시아에서 근무했어요.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악착같이 일했어요. 4년이 지날 때까지 숙소에서 지내며 외출외박 안 나갔어요. 독하게 했죠. 냉장고도 없어서 뜨거운 맥주에 땅콩을 안주삼아 시름을 달랬어요. 4년을 악착같이 모으니 1억을 모았어요. 한국에 있는 가족한테 전화하는 것도 아까웠어요. 5분 통화에 100불 정도였어요.”

 

4년이 지나고 좀 즐겨야 되겠다 싶어서 골프를 배웠다. 열심히 했더니 6개월 만에 싱글을 쳤다. 1995년 퇴사할 무렵에는 12,000만 원을 모았다. 결혼이 하고 싶어 사직서를 제출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1996, 지금의 아내를 만난 지 3개월 만에 결혼했다. 집에서 10원 한 푼 지원을 안 받았다. 어머니에게 쌍가락지를 해드렸다.

 

막상 결혼하고 나니까 막막했다. 한국에 섬유계통은 사라졌고, 외국에서 오래 근무한 탓에 사회 물정도 몰랐다. 어쩔 수 없이 바로 위 다섯째 형이 화성에서 운영하던 육가공 회사에 취직했다. 육가공과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6개월 정도 배우니 만만해 보이는 거예요. 나도 한 번 해보겠다고 덜렁 나왔어요. 형이 그렇게 말렸는데도. 형은 육가공이고, 나는 고기를 슬라이스 해가지고 식당에 납품할 요량이었어요. 1997년도에 수원 세류동에 회사를 차렸어요. 진짜 적응 안 되더라고요. 제 성격이 내성적이에요. 식당에 가서도 우리 고기 좀 써달라고 말을 못하는 거예요. 3개월 만에 문 닫았어요. 제가 판단이 좀 빨라요. 즉흥적으로 바로바로 결정해요. 1,500만 원 까먹었어요. 다시 형 밑으로 들어갔죠.”

 

3년 정도 지날 무렵 다시 사표를 썼다. 중학교 학비를 대주었던 넷째 형이 당시 수원 매탄동에서 정육점을 하고 있었는데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해서 인수를 했다. 3년 정도 지날 무렵 재개발에 들어가는 바람에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마침 육가공 회사를 경영하던 다섯째 형이 회사가 커지면서 한 대표를 불렀다. 형 밑에서 세 번째 근무하게 된 것이다. 1년 반 정도 시간이 다시 회사를 경영해보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렸다.

 

많지는 않아도 수중에 돈이 조금 있었어요. 그래서 다섯째 형 회사에 같이 다녔던 직원 한 사람과 함께 2005년도에 동업해 수원 세류동에 육가공 회사를 차렸습니다. 회사 이름을 두리축산으로 지었어요. 각자 1억 원 씩 투자했어요. 하루에 돼지 50마리를 작업했는데, 도매거래를 하다 보니 적자가 계속됐고 소매거래처를 확보하기는 쉽지 않았어요.”

 

상황 돌파를 위해 2007년도에 화성시 기안동으로 회사를 이전했다. 그 상황에서 동업자에게 일신상의 문제가 생겨 헤어지게 됐다. 동업자가 투자했던 1억 원을 힘들게 만들어 주었더니 회사 상황은 더 힘들어졌다. 2008년도에 회사 이름을 두리식품으로 변경하고, 혼신의 힘을 다해 일했다. 하루에 130마리를 작업할 정도로 규모가 커졌고, 그해부터 큰돈은 아니어도 흑자가 나기 시작했다. 2년 뒤인 201011월에 구제역이 대대적으로 발생해 풍전등화의 상황이었다.

 

그때도 판단을 빨리 했어요. 판단을 늦게 했으면 회사 문 닫았을 거예요. 당시 육가공 회사들 중에서 문 닫은 곳이 굉장히 많았어요. 왜냐하면 원료육이 없으니까요. 다 묻어버리니까 돼지 살 데가 없는데 어떻게 일을 해요. 구제역이 윗 지역에서 시작해 아래로 내려오는 거예요. 순식간에 우리 회사 근처까지 오더군요. 구제역 터졌다는 소리 듣고 곧장 중고차 시장으로 가서 5,000만 원 주고 5톤 탑차를 샀어요. 도축한 돼지 거는 시설 등 차량 꾸미는데도 적지 않은 돈이 들었어요. 구제역 안 터진 데 가서 돼지를 사와야 되잖아요. 새벽 1시에 구미로 내려가서 사 왔어요. 두 달 정도 계속 사 날랐죠. 그 때 돈을 꽤 많이 벌었어요. 돼지가 없으니까 부르는 게 값이었죠. 없어서 못 팔 정도였으니까.”

 

 

▲ 한목경 대표가 회사 경영 노하우를 설명하며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다.  © 화성신문


  

일정한 품질 유지, ‘고기 좋다소리 들어

 

 

두리식품은 그 뒤로 지금까지 계속 흑자를 유지하고 있다. 당시 공장 규모는 60평짜리 건물 두 동이었는데 물량이 늘어나니 작업 공간이 협소해졌다. 친구에게 공장 부지를 부탁했는데 경매 물건이 나왔다고 소개해줬다.

 

경매 물건을 두고 두리식품을 포함한 여섯 팀이 경쟁했는데, 경매일 하루 전에 유치권이 붙는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벌어졌다. 유치권 때문에 네 팀이 포기했고, 두 팀 중 더 많은 금액을 써낸 두리식품이 최종적으로 낙찰 받았다. 법원 판결로 유치권을 해결하는데 2년의 세월이 걸렸다. 두리식품이 현재 위치한 진안동 부지 1,300평은 그렇게 인연이 됐다.

 

두리식품 거래처는 300곳이 넘는다. 동네 큰 마트와 정육점 같은 곳들이다. 거래처에서 고기 좋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다고 한다. 이유가 궁금했다.

 

우리 회사 브랜드가 일미돈입니다. 맛이 좋다는 의미예요. 저희는 홍성에 있는 농장 두 곳과 직거래합니다. 농장 한 곳에서 3만 두 정도 해요. 농장이 고정돼 있는데다 도축장에서도 작업을 잘 해오고 있고, 최종적으로 우리 회사에서 해체 작업과 성형을 통해 제품의 품질을 최상급으로 일정하게 만들어요. 품질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게 관건입니다. 돼지고기 제품은 공산품처럼 찍어내는 게 아니잖아요. 각양각색이에요. 작업 과정을 통해 일정하게 만들어 냅니다. 예를 들어 삼겹의 경우 지방이 적당한 건 A급입니다. 지방이 많으면 소비자가 싫어하는 BC급이 되는 거예요. 이 지방을 까내는 성형 과정을 통해 A급처럼 만들어요.”

 

두리식품의 또 다른 강점은 청결이다. 생산에서부터 거래처에 전달되는 단계까지 식품의 안전성과 품질을 관리하는 위생관리 시스템 해썹’(HACCP)을 완벽하게 구현하고 있다. 철저한 모니터링 과정을 통해 제품의 신선도를 유지한다. 장기근속자들이 많은 것도 일정한 품질 유지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 대표는 고집스럽게도 국내산 돼지만 취급한다. 외국산에 비해 맛이 좋기 때문이다.

 

직원이 40명 정도 돼요. 그 중 절반이 생산직이에요. 나머지는 영업부와 관리부죠. 업계에서는 생산직 직원을 경륜에 따라서 AB급으로 구분해요. 생산 A급 남자는 칼잡이에요. 여자 A급은 성형을 잘하는 사람이죠. 남자들이 부위별로 해체해주면 여자들이 손질을 합니다. 지방은 몇 밀리미터로 까고 지저분한 거 떼어내죠. 아주머니들이 연세들이 많아요. 새로 뛰어드는 사람이 없으니까. 숙련자들이 많다보니 인건비가 만만찮아요. 생산직 작업은 오전 6시에 시작해서 오후 두세 시쯤이면 끝나요. 고생들이 많죠.”

 

돼지고기 중 대표적인 부위는 삼겹이다. 목살, 갈비, 등심, 안심, 전지(앞다리), 후지(뒷다리)(후지) 등 다양한 부위가 있다. 한 대표는 가격이 많이 내려와서 육가공 업체들이 곤욕을 치르고 있는 상황이라고 했다.

 

 

▲ 한 직원이 출고 작업을 하고 있다.  © 화성신문


  

지금까지 저 싫어하는 사람 못 봤어요

 

관리요? 저는 부서장에게 아예 맡겨버립니다. 권한위임이죠. 일일이 쫓아다니며 콩 놓아라 팥 놓아라 하지 않아요. 영업은 상무에게, 현장은 공장장에게, 경영지원부도 마찬가지고요. 저도 제 몫을 해야 하잖아요. 제가 하는 일은 출고업무예요. 도와주는 개념이 아니라 제 몫이죠. 누군가 잘못해서 문제가 발생하면 윽박지르지 않아요. 같이 머리 맞대고 해결책을 찾죠. 관심이 최고 해법입니다. 하하.”

 

육가공을 둘러싼 경영환경이 점차 악화되고 있다. 대기업들이 뛰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대기업은 사료공장부터 농장, 육가공, 유통을 원스톱으로 처리가 가능하다. 그래도 살아날 구멍은 있는 법이다.

 

대기업들은 비용이 많이 들어가잖아요. 단가 면에서 우리하고 싸움이 안 돼요. 마진이 두 배 이상은 차이 나죠. 예를 들어 원가가 1만 원이라면, 우리는 12,000원에 파는데 대기업은 15,000원에 파는 식이죠. 그런데 소비자들은 별로 못 느껴요. 동네마다 지정된 가격에 사 먹으니까요. 그렇게까지 가격 비교를 안 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살아남으려면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방법을 찾아내야 합니다. 삽겹과 족발 같은 부위를 식당에 직접 납품하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장기적으로 한우를 취급하는 것도 생각하고 있어요.”

 

한목경 대표에게 경영 노하우를 물었다. 의외의 대답이 들려왔다.

 

저는 진짜 아무 생각 없이 판단합니다. 깊게 생각 안 해요. 복잡한 거 싫어하거든요. 성격은 내성적이지만 판단을 엄청 빨리합니다. 성격도 무난해요. 어떤 성격이라도, 아무리 까칠한 사람이라도 맞출 수 있어요.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거든요. 그래서 그런지 지금까지 저 싫어하는 사람 못 봤어요. 하하.”

 

두리식품은 혼을 담은 기업을 지향한다. 한 대표 좌우명도 혼()이다. 영혼 할 때 그 혼이다. 목숨을 건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청결에 혼을 담고, 내 가족이 먹는 고기를 만든다는 책임감으로 회사를 경영한다고 했다.

 

직원들이 자기 맡은 일 잘 해주면 그것 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어요. 그게 보람이죠. 저와 처자식, 직원들이 건강하면 또 그게 행복이고요. 저는 성공에 큰 욕심 없어요. 지금도 성공했잖아요. 지난해에는 경제사정이 어려운 분들을 위해 고기 10톤을 기부했습니다. 이런 게 사는 재미죠.”

 

중학교 시절까지 도시락을 한 번도 사가지 못했다는 한 대표. 학교에서 영세민들에게 나눠주는 빵 하나를 얻어먹으면서도 얼굴에 웃음기가 없는 날이 없었다고 한다. 화목과 소통이라는 단어를 유달리 좋아한다고 했다.

 

한 대표가 찾은 인생의 의미는 ()’이었다. 그에게 은 회사와 관련해서는 성취감이었고, 개인의 삶 측면에서는 즐거움이었다. 즐거움의 원천은 취미인 바다낚시와 드럼 치기였다. 은퇴 시기는 10년 후쯤으로 잡고 있다. 스물 한 살인 둘째 아들이 아버지 일에 관심을 보이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했다.

 

김중근 기자 news@ihs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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